한국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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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화재가 끼친 영향은

kfsl 2025. 3. 25. 20:14

1666년 9월 2일 새벽, 런던 시내 푸딩 레인(Pudding Lane)의 한 빵집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습니다. 모두가 잠든 사이, 그 불씨는 굴뚝을 타고 천장으로 번졌고, 바람을 타고 다른 건물로 옮겨붙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불씨는 결국 런던의 절반을 삼킨 대화재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런던은 좁고 뒤엉킨 골목과 목재와 타르로 지어진 건물들 그리고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상가와 주택들로 인해 화재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으며, 여름 내내 이어진 가뭄에 더해 강하게 불어온 동풍은, 마치 불붙기만을 기다리는 마른 장작을 도시 위에 가득 쌓아놓은 듯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불은 3일 만에 시내 중심부를 집어삼켰고, 런던 탑 근처에서 가까스로 멈춰 섰습니다. 시 전체 인구의 6분의 1이 집을 잃었고, 주택 13,000여 채, 교회 87곳, 시청과 시장건물, 세관청까지 모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2016년, 런던 대화재 350주년을 맞아 템즈강에서 17세기 당시 런던 스카이라인을 재현한 120m 길이의 나무 조각품 '런던 1666'을 불태우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는 대화재를 기억하고 교훈을 되새기기 위한 퍼포먼스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재에서 눈여겨볼 점은 단지 피해의 크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후’입니다. 런던은 단지 도시를 복구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았고, 그들은 도시를 재설계했습니다. 좁고 굽은 골목 대신 비교적 직선의 넓은 도로가 생겼고, 목재가 아닌 벽돌과 석재로 건물을 짓도록 하는 법령이 마련되었습니다. 최초로 건축 기준이 제도화된 것이며, 이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건축법규와 방재설계 개념의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재 보험 제도 역시 이 시기를 계기로 태동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소방 체계는 공공이 아닌 민간 보험사 주도로 운영되었으며, 보험 가입 건물에 소속 소방대가 우선 출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화재 직후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화재 보험 회사가 등장했고, 이들은 보험에 가입한 건물에 작은 금속판을 부착하여, 화재 시 해당 보험사의 민간 소방대가 출동하게 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한 번의 화재가 도시의 구조, 제도,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례는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사고를 계기로 제도가 바뀌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여러 번 있었고, 런던 대화재는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물론 당시에도 수많은 회의와 반대가 있었습니다. “원래대로만 복구하자”는 목소리, 비용과 시간을 이유로 현상 유지에 머무르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감히 다르게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화재에 강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실제 제도와 건축 양식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런던은 그 결정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 사건은 현대 방재 개념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도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재난은 늘 예기치 않게 오지만, 그 이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안전 수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당시엔 과학적 화재 모델도, 성능위주설계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화재의 속성과 도시의 구조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출발점은 이미 1666년 그날, 불길 속에서 마련되고 있었습니다.